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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경제사- 2000년대 it 닷컴 버블 역사카테고리 없음 2020. 10. 29. 11:39
우리나라는 외환위기를 경험하며 경제를 다시 살리기 위해 전 국민이 힘을 합해 외환위기를 극복하려 노력합니다. 1999년부터 IMF 금융위기를 극복하느 ㄴ하나의 방편으로 주식투자로 나라를 다시 일으키자는 펀드들이 나오면서 간접투자시장의 열풍이 불기 시작했고 엄청난 자금을 빨아드리며 주식시장 전체를 달구기 시작했습니다. 반대편 미국에서는 1994년부터 꾸준히 올린 금리로 인해 이머징 시장에 투자되었던 많은 외국인 자금들이 미국으로 흡수 되었고 그로 인해서 미국을 제외하고 나머지 국가들은 기절 직전 상황이었기에 그린스펀은 1995년부터 단계적으로 낮추면서 다시 유동성을 공급하기 시작합니다. 중앙은행에서 기준금리의 방향을 변경한다는건 투자자들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단서입니다. 이때 그린스펀은 기준금리를 올리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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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경제사 - IMF외환위기이후 한국 경제 구조 변화한국 경제 역사 2020. 10. 27. 13:46
외환위기 이전 우리나라의 경제성장률은 항상 10%를 웃돌며 경제성장을 했습니다. IMF 외환위기가 일어난 핵심원인은 과도했던 기업들의 대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때 기업들의 평균부채비율이 400%가 넘엇습니다. 쉽게 말해서 자본금이 5억이 있는 회사가 20억짜리 사업을 굴리고 있었던거죠 과도한 투자로 인해 고용시장 또한 거품이 끼기 시작합니다. 엄청나게 레버리지를 당겨 공격적인 투자를 하니 사람 또한 많이 필요할 수 밖에 없습니다. 취직도 잘 되고 그 만큼 기업들이 돈도 잘 버니 월급도 잘 오릅니다. 너무 아름다운 시절이죠. 97년까지 기업소득 증가률과 가계소득 증가률은 비슷했습니다. 기업들은 매출이 늘면 그 만큼 직원들에게 보너스를 줬었죠. 이 시기에는 회사의 성장이 곧 나의 성장이었고 엄청난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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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경제사 - 우리나라 IMF 외환위기 (정부편)한국 경제 역사 2020. 10. 24. 14:26
보통 수출로 먹고 사는 그 당시 대부분의 이머징 국가들은 환율이 고정돼있는 걸 선호합니다. 이머징 국가들은 수출을 많이 하는 국가들인데 환율이 오르는게 좋은게 아닌가?라고 의문이 들게 되죠. 하지만 개발이 한창인 이머징 국가들의 수출기업들 같은 경우 자국의 통화가치가 절하되서 가격경쟁력이 높아지는 것도 좋지만 환율이 너무 변동 적인 것 보다는 환율이 안정되있는 것이 미래의 예측이 가능해지고 새로운 계획에 대한 불확실성이 없어집니다. 투자와 대출 수출계약에 있어서 굉장히 편하다 할 수 있죠. 해외에서 투자를 하는 외국인들 입장에서도 이머징의 성장가능성을 보고 달러를 원화로 바꿔 한국의 주식시장과 채권시장에 들어오고 싶은데 환율 변동이 너무 심하면 환율 때문에 쉽게 손이 안가죠. 예를 들어서 한국채권 금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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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경제사 - IMF 외환위기 종금사편한국 경제 역사 2020. 10. 23. 15:22
기업들은 높은 은행 문턱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엄청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을까? 기업들의 자금 줄 역할을 하며 든든한 지원군이었던 종금사를 통해 우리나라의 외환위기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종합금융회사는 외화 조달부터 여,수신까지 금융 업무 대부분을 취급할 수 있는 금융기관입니다. 종금사의 탄생은 박정희 정부 때 외화 조달을 위해 1975년 종합금융회사에 관한 법률안을 마련했고 1976년 한국종금을 시작으로 6개의 종합금융회사가 탄생하기 시작합니다. 초기 종금사들은 선진국 금융회사와 자본을 섞어 대외신인도를 개선하고 기업에 신용대출을 제공하며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종금사는 어음관리계좌 운용과 발행어음 판매 방식으로 은행처럼 예금도 받기 시작했고 1993년에는 100명이 안되는 소수의 인원으로 6개사 합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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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경제사 - IMF 외환위기 (기업편)한국 경제 역사 2020. 10. 22. 13:27
우리나라는 1980년대 중후반 3저에 힘입어 기업들의 엄청난 투자와 성장이 지속되었고, 1991년부터 단계적 금리 자유화를 개시했습니다. 또한 OECD의 가입요건을 맞추기 위해 1992년에는 자본시장을 조금씩 개방하기 시작하며 외국인 투자를 받으며 우리나라 경제는 엄청난 성장을 거두었고, 외국인들에게 관심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에 길가는 사람 붙잡아서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라고 물어보면 10명중 6명이 "네"라고 답할 정도였습니다. 이 시기에는 기업이 사람들을 채용하고 싶어서 난리였습니다. 어딜 들어갈까 고민을 할 정도였죠. 근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제발 저 좀 뽑아주세요" 아닌가요? 한창 잘나가던 대한민국 기업들이 외환위기라는 칼을 맞고 쓰러진 채 지금까지도 그 충격에서 벗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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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사 - 1985년~1989년 유래없는 호황기카테고리 없음 2020. 10. 21. 12:26
1980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80년대 우리나라는 단군이래 유례없는 호황을 누리게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80년대의 호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글로벌 경제흐름을 파악해야 합니다. 70년대는 인플레이션의 시대였습니다. 두 차례 석유파동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물가가 치솟았고 물가는 오르는 데 경기는 좋아 지지 않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발생하면서 세계 패권을 쥐고 있는 미국에서는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전설적인 인프렐이션 파이터 폴 볼커를 미국 중앙은행인 fed 의장으로 임명합니다. 폴 볼커는 물가를 잡기 위해 기준금리를 인상하기 시작했고 "경기둔화를 감수하고 물가를 잡겠다"라는 말을 하며 기준금리를 20%까지 인상합니다. 이 당시 전두환은 정권은 잡았는데 막상 어디서부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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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경제사 - 1979~1982년 오일달러 건설주 파동한국 경제 역사 2020. 10. 20. 14:50
박정희 정권시절 고도의 압축 성장을 해오는 과정에서 1973년 10월 1차 오일쇼크로 인해 석유 원자재 가격이 3달러에서 11달러로 하루 아침에 가격이 폭등을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하지만 그때 당시 우리나라는 이제 막 중화학공업에 박차를 가했고, 대외 수출 또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기에 1차 오일쇼크로 인한 피해가 크지 않았습니다. 글로벌 석유 수요는 지속적으로 증가하는데 공급을 줄이면서 석유의 가격이 급등을 했고 중동은 앉은 자리에서 4배나 수입이 늘어나게 됩니다. 중동은 땅에 파이프만 꼽았다 하면 석유가 나오긴 하는데 이 석유를 운반할 수 있는 도로, 항만, 등 국가 기반 시설이 열악했습니다. 중동 국가들은 유가 폭등으로 벌어들인 막대한 오일달러를 통해 사회간접자본 확충에 힘을 쏟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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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경제사 - 기업공개(IPO)를 강제로 시키다.한국 경제 역사 2020. 10. 19. 14:50
1972년 8월 3일 박정희 정부 시절 기업들의 사채를 동결 시켜 주면서 당시 쓰러져가는 기업들의 집단 도산을 막아주었습니다. 기업들은 그 대가로 빚 부담을 덜어준 만큼 나중에 사업이 잘되면 기업공개(IPO)를 통해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는 약속을 정부와 하게 됩니다. 박정희 정부는 8.3 조치를 계기로 기업의 소유 및 지배구조를 개선하고 동시에 자본시장을 활성화 시킬 수 있는 기회라고 판단을 했습니다. 하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기업공개가 탐탁치 않았습니다. 투자자 보호 명목으로 공모가액 산정 때 액면가를 넘지 않도록 규제하고 있었고, "대주주는 주식지분을 51% 이하를 소유 해야한다". 등 상장 요건을 맞추려면 51%를 초과하는 주식들을 헐값에 팔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업공개가 되면 경영권이 흔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