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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경제사 - 1979~1982년 오일달러 건설주 파동한국 경제 역사 2020. 10. 20. 14:50
박정희 정권시절 고도의 압축 성장을 해오는 과정에서 1973년 10월 1차 오일쇼크로 인해 석유 원자재 가격이 3달러에서 11달러로 하루 아침에 가격이 폭등을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하지만 그때 당시 우리나라는 이제 막 중화학공업에 박차를 가했고, 대외 수출 또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기에 1차 오일쇼크로 인한 피해가 크지 않았습니다.
글로벌 석유 수요는 지속적으로 증가하는데 공급을 줄이면서 석유의 가격이 급등을 했고 중동은 앉은 자리에서 4배나 수입이 늘어나게 됩니다.
중동은 땅에 파이프만 꼽았다 하면 석유가 나오긴 하는데 이 석유를 운반할 수 있는 도로, 항만, 등 국가 기반 시설이 열악했습니다. 중동 국가들은 유가 폭등으로 벌어들인 막대한 오일달러를 통해 사회간접자본 확충에 힘을 쏟게 됩니다.
이때 박정희는 과거 1960년대 외화획득을 위해 독일로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했고 그로 인해 자국의 암담한 경제성장을 견인했던 것과 같이 독일도 반한 우리 민족의 근면 성실과 우리나라의 낮은 인건비를 앞세우면 중동에서도 다른 나라 기업들과 붙어 볼만하다고 판단을 합니다.
고심 끝에 정부는 중동진출 총 공세를 선언하며 관련 기업에게 각종 혜택을 제공하겠다고 발표합니다.
건설업체들은 너도나도 중동 행 비행기에 탑승할 청년 근로자 모집광고를 내 걸었고 1976년을 시작으로 중동으로부터 대규모 건설사업 수주 소식이 잇따르게 됩니다.
국내 건설업체는 기대 이상으로 선전을 하며 천문학적 규모의 사업을 연달아 따냇고 각종 물자, 건설자재, 생활용품을 생산하는 기업들 또한 같이 엄청난 성장을 하게 됩니다.
건설사 기업공개 날에는 새벽부터 청약을 받으려는 투자자들이 넘쳐 났고, 최대의 건설사인 동아건설산업 대림산업의 주가는 하늘을 뚫을 기세로 치솟았으며 1976년 현대건설 또한 엄청난 규모의 주바일 산업항 공사 계약을 따내며 정부 또한 파격 지원에 나섰습니다.
중동으로 건너간 근로자들은 7~8월이면 기온이 섭씨 40~60도까지 올라가 온몸을 가리고 작업을 하면서 오전 6시부터 오후 5시까지 식사시간 빼고 하루 10시간을 쉬지않고 일을 했습니다. 근로자들은 한 푼이라도 더 벌기 휘해 시간 외 근무를 밥 먹듯이 했습니다.
먼 타향살이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가족을 위해 나라를 위해 헌신을 하며 횃불을 든 채 밤샘 작업을 했고 이러한 중동진출은 우리나라 경제 발전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가혹한 근로 환경에서 흘림 땀과 맞바꾼 오일달러는 우리나라의 고질적인 경상수지 적자를 흑자로 돌려놓는데 큰 기여를 합니다. 오일달러는 이렇듯 근로자들의 피땀이 벤 눈물 달러입니다.
건설사들은 중동뿐 만 아니라 압구정에서 강남까지 개발 붐이 불면서 거침없는 상승세를 이어갔습니다. 1977년 투기는 절정에 달했고 국내 주식 거래대금은 1조 3,500억원으로 전년의 2배로 불어 났고, 일반 제조업들이 건설업 진출 계획만 내놔도 상한가로 직행을 했습니다. 코로나 관련 치료제 개발 계획만 발표해도 상한가로 직행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엇죠
부동산과 과열 주식시장도 과열 물가상승률은 빠르게 치솟기 시작하니 정부는 경기 과열과 인플레이션을 걱정하며 거품을 빼는 전격적인 금리인상을 발표합니다.
부동산 투기 억제 정책을 발표했고, 국내 건설사들은 중동건설붐에 힘입어 사업 자금 조달을 위해 지속적으로 유상증자를 했는데 갑자기 한국은행이 정기예금 금리를 6년 만에 최고인 18.6%로 4.2% 인상했고 일반 대출금리는 16%에서 19%로 조정을 하면서 기업들의 실적이 안 좋아 질 것이라 예상한 투자자들은 너도 나도 주식을 팔고 자금을 예끔으로 옮기며 주식시장은 1년 반 만에 시가총액의 70%가 사라져 버립니다.
1979년 2차 오일쇼크가 터지면서 안 그래도 위태로운 건설사들은 이때는 이미 회생 불능 상태가 됩니다. 건설업체들은 지금까지도 과도한 부채 의존형 경영 탓에 경제위기 때마다 무더기로 수술대에 오르게 됩니다.
1차 오일쇼크와는 달리 2차 오일쇼크 때는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1979년에 우리는 중공업과 대외수출 비중 또한 컸고 그 시대 성장펌프 역할을 하던 건설사들이 쓰러지게 되면서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하게 됩니다.
같은 해 박정희 대통령이 총격으로 급사하게(10.26사태) 되고 전두환이 정권을 잡으며 물가안정 없이는 경제성장도 없다. 물가상승률을 한자리 수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걸고 다시 우리나라 경제를 살릴 방안을 모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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