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 역사
-
한국의 경제사 - IMF 외환위기 종금사편한국 경제 역사 2020. 10. 23. 15:22
기업들은 높은 은행 문턱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엄청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을까? 기업들의 자금 줄 역할을 하며 든든한 지원군이었던 종금사를 통해 우리나라의 외환위기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종합금융회사는 외화 조달부터 여,수신까지 금융 업무 대부분을 취급할 수 있는 금융기관입니다. 종금사의 탄생은 박정희 정부 때 외화 조달을 위해 1975년 종합금융회사에 관한 법률안을 마련했고 1976년 한국종금을 시작으로 6개의 종합금융회사가 탄생하기 시작합니다. 초기 종금사들은 선진국 금융회사와 자본을 섞어 대외신인도를 개선하고 기업에 신용대출을 제공하며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종금사는 어음관리계좌 운용과 발행어음 판매 방식으로 은행처럼 예금도 받기 시작했고 1993년에는 100명이 안되는 소수의 인원으로 6개사 합산..
-
한국의 경제사 - IMF 외환위기 (기업편)한국 경제 역사 2020. 10. 22. 13:27
우리나라는 1980년대 중후반 3저에 힘입어 기업들의 엄청난 투자와 성장이 지속되었고, 1991년부터 단계적 금리 자유화를 개시했습니다. 또한 OECD의 가입요건을 맞추기 위해 1992년에는 자본시장을 조금씩 개방하기 시작하며 외국인 투자를 받으며 우리나라 경제는 엄청난 성장을 거두었고, 외국인들에게 관심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에 길가는 사람 붙잡아서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라고 물어보면 10명중 6명이 "네"라고 답할 정도였습니다. 이 시기에는 기업이 사람들을 채용하고 싶어서 난리였습니다. 어딜 들어갈까 고민을 할 정도였죠. 근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제발 저 좀 뽑아주세요" 아닌가요? 한창 잘나가던 대한민국 기업들이 외환위기라는 칼을 맞고 쓰러진 채 지금까지도 그 충격에서 벗어나..
-
한국의 경제사 - 1979~1982년 오일달러 건설주 파동한국 경제 역사 2020. 10. 20. 14:50
박정희 정권시절 고도의 압축 성장을 해오는 과정에서 1973년 10월 1차 오일쇼크로 인해 석유 원자재 가격이 3달러에서 11달러로 하루 아침에 가격이 폭등을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하지만 그때 당시 우리나라는 이제 막 중화학공업에 박차를 가했고, 대외 수출 또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기에 1차 오일쇼크로 인한 피해가 크지 않았습니다. 글로벌 석유 수요는 지속적으로 증가하는데 공급을 줄이면서 석유의 가격이 급등을 했고 중동은 앉은 자리에서 4배나 수입이 늘어나게 됩니다. 중동은 땅에 파이프만 꼽았다 하면 석유가 나오긴 하는데 이 석유를 운반할 수 있는 도로, 항만, 등 국가 기반 시설이 열악했습니다. 중동 국가들은 유가 폭등으로 벌어들인 막대한 오일달러를 통해 사회간접자본 확충에 힘을 쏟게 됩니다..
-
한국의 경제사 - 기업공개(IPO)를 강제로 시키다.한국 경제 역사 2020. 10. 19. 14:50
1972년 8월 3일 박정희 정부 시절 기업들의 사채를 동결 시켜 주면서 당시 쓰러져가는 기업들의 집단 도산을 막아주었습니다. 기업들은 그 대가로 빚 부담을 덜어준 만큼 나중에 사업이 잘되면 기업공개(IPO)를 통해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는 약속을 정부와 하게 됩니다. 박정희 정부는 8.3 조치를 계기로 기업의 소유 및 지배구조를 개선하고 동시에 자본시장을 활성화 시킬 수 있는 기회라고 판단을 했습니다. 하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기업공개가 탐탁치 않았습니다. 투자자 보호 명목으로 공모가액 산정 때 액면가를 넘지 않도록 규제하고 있었고, "대주주는 주식지분을 51% 이하를 소유 해야한다". 등 상장 요건을 맞추려면 51%를 초과하는 주식들을 헐값에 팔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업공개가 되면 경영권이 흔들..
-
한국의 경제사 - 1972년 8월 3일 사채동결조치한국 경제 역사 2020. 10. 19. 00:32
"박정희 정부는 1972년 8월 3일 이날 0시를 기해 모든 기업의 사채를 "월 이자 1.35%(연 16.2%), 3년 거치 후 5년 분할상환으로 조정한다" 길지 않은 우리나라의 자본주의 경제 역사에 기업의 부채를 국가가 나서 구해준 사건이 있었습니다. 자본주의의 원칙인 자유시장경제체제를 한 순간에 무너트린 사건은 1972년 8월 3일 단행됩니다. 바로 8.3 사채동결초지 입니다. 우리나라의 본격적인 경제 발전의 시작은 박정희 정부가 들어선 후 부터입니다. 해방을 하고 몇 년 뒤 6.25전쟁을 하게 되고 정전협정에 이르는 동안 한국 경제는 전쟁으로 인해 높은 물가 상승과 전쟁에 따른 재산 손실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우리나라 국민들의 소득수준은 형편 없었는데 높은 인플레이션 때문에 국내저축에 따른 자..
-
한국 현대 경제사 - 1958년에 일어난 국채파동 사건한국 경제 역사 2020. 10. 17. 15:47
https://monsterofcapitalistic.tistory.com/94 우리나라는 언제 증권거래를 시작했을까? 우리나라는 언제부터 증권거래를 시작했을까요? 조선 정부의 허가 없이 일본은 쌀의 품질 및 가격 표준화를 명분으로 일본인들이 모여 1896년 인천항에 인천미두취인소를 설립하게 됩니다. 인천 monsterofcapitalistic.tistory.com 6.25 전쟁 이전의 한국의 현대 경제사가 궁금하신분들은 먼저 보고 오셔도 됩니다. 1945년 일제의 패망으로 인해 우리나라는 해방이 되고 지난 포스터에서 다뤘듯이 1956년 2월 대한민국 최초의 거래소인 대한증권거래소(현 한국거래소)가 설립됩니다. 하지만 당시 증권거래소의 기능은 오늘과 같지 않았습니다. 이제 막 걸음마 단계인 시점에서 문제..
-
우리나라는 언제 증권거래를 시작했을까?한국 경제 역사 2020. 10. 17. 02:02
우리나라는 언제부터 증권거래를 시작했을까요? 조선 정부의 허가 없이 일본은 쌀의 품질 및 가격 표준화를 명분으로 일본인들이 모여 1896년 인천항에 인천미두취인소를 설립하게 됩니다. 인천미두취인소는 현물 없이 쌀을 사고파는 현재의 선물시장과 비슷한 기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본의 경우는 1700년대부터 존재했던 선물시장이 였기에 인천미두취인소는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의 돈을 합법적으로 빼앗아 갈 수 있는 투기장이었습니다. 시세 또한 오사카도지마취인소에서 날아오는 전보로 시세를 정했는데 이 전보를 미리 알아 이득을 취하는 일본인들도 많았습니다. 당시 자본주의체계를 전혀 모르는 한국인들은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따는 소문이 퍼지자 너도나도 논과 밭을 팔고 인천미두취인소로 집합합니다. 일확천금의 꿈을 꾸며 투기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