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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경제사 - 에도막부시대의 흑선내항과 막부타도 존왕양이파
    카테고리 없음 2020. 11. 20. 10:30

    지방 분권적이면서 강력한 중앙집권을 이뤄낸 에도 막부 시대 그런데 어떠한 정권도 지속될 수는 없는 법이죠. 에도 막부 말기부터 서서히 균열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일본경제사 - 에도막부 시대 메이지유신의 근대화 기반을 다지다.

    지난 게시글을 통해 전국시대에 각 지역을 할거하고 있던 다이묘들의 끊임 없는 전쟁과 그 전쟁을 종식시키고 전국 통일을 이루는 인물들을 시대순으로 알아봤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

    monsterofcapitalistic.tistory.com

     

     

    에도를 중심으로 막대한 자본이 집중되었고 이로 인해 교통과 통신이 활성화 되어 상품경제와 화폐경제가 급속도로 발달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사회적 경제적 변화는 기존에 유지되던 계급체계를 흔들어 놓습니다. 당시 사농공상의 계급사회였던 에도시대에서 상인들은 최하계급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열리활동은 비천한 것으로 간주하는 생각이 에도시대 이전부터 뿌리 깊게 남아있었습니다.

     

    에도시대 조닌

    그런데 자본주의 태동을 시작한 에도시대에서 막대한 자본을 축적하는 계급은 바로 상인들이었습니다. 전쟁과 갈등이 반복되던 시기에는 사무라이들의 힘은 어마어마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평화로워지니 딱히 무사가 필요가 없어집니다. 

     

     

    그러면 그 힘을 가지고 사무라이들도 상인이 되서 장사를 하면 되는거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당시 대다수 사무라이들 직위는 거의 세습제로 고정이 되있었기에 주어진 사명에만 충실하게 살아가야하는 시스템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배가 고파도 장사를 할 수 없었고 오로지 녹봉으로 받는 쌀을 통해 먹고 살아왔는데 정말 딱 입에 풀칠할 정도 였습니다. 어떠한 사회에서도 구세대와 신세대의 교체는 갈등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에도시대대기근

    점점 균열 조짐이 보이는 에도막부에 잇따른 대기근(간에이 대기근, 교호대기근, 덴메이 대기근, 덴포대기근 17세기는 전 세계적으로 소빙하기 였음)이 발생했고 대기근으로 인해 식량이 불안정 해지고, 쌀 가격은 폭등 했으며 18세기 후반 들어서는 여기저기서 농민들의 봉기와 민중들의 저항이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막부에서 개혁을 진행하지만 계속된 실패로 일본 경제는 더 불안해지고 성장하고 있던 상업경제가 쇠퇴하기 시작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각 계급들의 불만들은 서서히 커지기 시작했고 이러한 불만을 잠 재우기 위해 내부의 급한 불부터 끄려고 하지만 외부에서 누군가가 기름을 확 부워버립니다.

     

    이 당시 일본은 쇄국정책을 펼치며 서양 세력을 막고 있었지만 19세기 들어 서양은 나날이 강성해져 중국을 시작으로 점차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습니다. 

     

    19세기 미국은 태평양 연안까지 영토 확장에 성공했고 그 결과 영국의 영향권인 대서양과 인도양을 지나지 않고 태평양으로 한 큐에 중국으로 갈 수 있게 됩니다. 당시 중국은 유럽의 온갖 생산품을 팔 수 있는 4억 인구의 시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중국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일본이 있었던 거죠. 미국이 태평양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일본을 반드시 자신의 영양권에 둬야 했습니다.

     

    흑선내항

     

    그리고 1853년 일본 앞 바다에 4척의 미국 군함이 나타탑니다. 이 함대를 이끄는 페리 제독은 일본의 개항을 요구하게 되는데요? 산업혁명의 성공으로 이전의 알고 있던 배와 비교가 안되는 사이즈의 증기선을 본 일본 에도 시내는 패닉 상태였습니다. 

     

    미일 화친조약

    이때 당시 일본 조정은 몇 년 전 발발한 아편 전쟁으로 중국이 영국에게 무기력하게 무릎을 꿇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에도 막부는 쇄국 정책을 포기하고 미국과 1854년 3월 31일 미일 화친조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미국에 이어서 (1854년 10월 14일 영일화친조약체결, 1855년 2월 7일 러일화친조약체결, 1855년 11월 24일 불일화친조약체결) 다른 서양 열강들과도 조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초기 서양 열강들의 일본 개항 목적은 단순히 중국으로 가기 위해 부족한 물자 보급과, 석탄공급, 선원들의 휴식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미일수호통상조약

     

    그런데 1858년 7월 미국과 새롭게 양국간의 무역까지 허용하는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고 이를 위해 추가적으로 다섯개 항구를 개항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통상 조약은 불평등 조약이었고 미국에 이어 서양 열강들과 동일한 내용의 수호통상 조약을 연이어 체결하게 되는데 이를 안세이 5개국 조약이라고 합니다.(8월, 화(네덜란드)일, 러일, 영일, 10월 불일) 이러한 갑작스런 개항으로 일본 경제는 혼란 상황에 빠졌고, 국내외 금은의 가격차로 금이 해외로 유출되고, 값싼 외국 제품이 들어오면서 일본 내에 많은 생산자들이 파산하게 됩니다. 

     

    존왕양이

    열강에게 중국처럼 일본이 먹히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막부는 개국을 했지만 당연히 강제 개항을 한 무능한 막부를 비판하며 반막부 세력이 등장하게 되었고, (막부를 몰아내고 왕정복고와 외세를 배척하자는 운동) 존왕양이파가 되어 막부의 폐지를 주장하게 됩니다. 

     

    반 막부세력은 도요토미를 따랐던 3등급 도자마 다이묘들이 주축이 되었고, 대표적인 세력이 사쓰마와 조슈번이었습니다. 이들은 에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변방에 영지를 받았기 때문에 농업중심이 아닌 상업 중심으로 재정을 다져갔습니다. 무역에 유리한 항구를 끼고 있어서 서구 문물 및 정보 유입에 유리하였고 당시 쇄국정책으로 인해 서양물품을 밀수하며 부를 축적하게 됩니다. 

     

     

    특히 조슈번은 힘을 키우기 위해 선진문물에 개방적이고 능력중심의 인재를 고용하며 자체 개혁에 성공하였고 막부타도에 기회를 기다리고 있을 때 강제 개국이 명분이 되어 반막부 세력의 중심이 됩니다. 

     

    시모노세키전쟁

    이들은 존왕양이의 입장을 취했으나, 사쓰마 번은 영국과의 사이에서 벌어진 사쓰에이 전쟁, 그리고 4개국 연합함대와 조슈번 사이에서 벌어졌던 시모노세키 전쟁에서 탈탈 털리고 깨닫게 됩니다. 

     

    반막부세력은 서구와 자신들의 기술력, 특히 군사부분에서의 실력 차이를 절실하게 깨닫게 되고 양이를 포기하고 서구의 발달된 기술을 도입하는 쪽으로 태세를 전환하며 개국도막을 내세우게 됩니다. 

     

    보신전쟁

    막부세력과 반막부세력 간의 대결은 평화적인 해결 노력에도 불구(대정봉환)하고 결국 무력대결(보신전쟁)로 막을 내림으로써 에도 막부에서 천황중심의 국가로 넘어가게 되고 드디어 봉건시대가 막을 내리고 중앙 집권적인 근대 국가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됩니다. 

     

    그런데 말이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이뤄내자지 구체적인 방향과 계획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일본이 어떻게 서양이 수 백년 만에 닦은 근대화를 50년만에 이뤄낼 수 있었을까요?

    해당 내용은 다음 게시물을 통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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